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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기 투쟁 사업장!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돈으로 해결하는 것은 파멸이다.
    하이닉스2007 2021. 6. 15. 22:31

    2005년 5월 3일 [출처:금속노조홈]호연지기

     

     

     

    장기 투쟁 사업장!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돈으로 해결하는 것은 파멸이다.

     

     

     

    장기 투쟁 사업장!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돈으로 해결하는 것은 파멸이다.




    장기 투쟁 사업장!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돈으로 해결하는 것은 파멸이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들의 구호로 알 수 있다. 처음 투쟁을 시작한 이들의 입에
    가장 자연스럽고 잦은 구호는 “~~~ 해서 사람답게 살아보자!”라는 절규다.
    인간성에 대한 갈구가 가장 절박한 그리고 빛나는 시기의 구호다.

    그 다음에 단결과 연대다. 그 신나는 경험! 여러 가지 주눅과 고립과 외로움에
    치여 살던 노동자들에게 옆에 동료가 경쟁하는 적이 아니라 동지라는 것, 그간의
    대립과 다툼의 많은 부분이 오해나 의도적으로 조장된 것이라 것에 묵은 감정
    풀며 “이것이 사람 사는 거구나”하는 신나는 신세계를 만난다.

    투쟁이 길어지거나 투쟁을 통한 성과가 톡톡 들어나는 시기가 지나면 노조와
    투쟁에 대한 초발심이 눅어지고 점차 일상으로 퍼져 생동감이 죽어간다. 그때
    아니 그전부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학습과 소모임 활동을 쟁여놔야 하지만 어찌
    그것이 쉬운 일일까?

    투쟁에 길어진다는 것은 생활고와 마음고생을 함께 겪는 것이다. 경제적 어려움이
    아주 쉽게 노조에 대한 희망을 투쟁을 통한 돌파를 가로막고 선다. 그 배후가
    저들의 회유 협박 분열 이간 책동 속에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오래된 상식의
    작동이다.

    이 때 남는 것이 결국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 돈도 충분한 적이
    없지만 돈으로 하는 해결은 사람답게 살기 위한 노조가 실리를 위한 노조로 격이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돈과 권력과 힘이 희망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돈
    앞에 “그놈이 그놈”이라는 냉소와 “칼자루 쥔 놈 이길 수 없다.”는
    패배주의를 주고 결국 나만이라도 살자는 냉혹한 이기주의 그 공동체성의
    황폐화로 귀결되고 만다.

    이런 자연 발생적 흐름을 막기 위해 학습, 연대, 의식화 조직화를 위해 애를
    쓰지만 우리의 노력은 태풍 앞 촛불처럼 작고 연약하다. 그런데 이렇게 저렇게
    들리는 투쟁의 결말은 자본에게 가장 쉬운 방법이자 노조 얼굴에 똥물을 끼얹고
    현장 안에 노조활동의 씨앗마저 깡그리 없애 버리는 돈으로 해결하는 방법,
    아니면 현장에서 배제됨을 받는 방법을 어쩔 수 없다고 수용한다. 그리고 이것을
    관철하는 수단이다 면피 이유로 동원되는 것이 놀랍게도 지친 조합원들의
    총의(총회 투표)라는 것이다.

    고생 고생하던 지도부의 항복과 조합원들의 생활고와 지친 마음이 합쳐서
    만들어진 다수결이 과연 노조의 대의에 맞고 민주주의가 관철된 결과일까?

    더 걱정스러운 것은 어느덧 비정규직이나 이전 투쟁의 정형이 굳어지는 것이다.
    현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은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으로 비정규직은 도급 하청으로 도급 하청은 사외 하청으로 쉼 없이
    배제되고 마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투쟁의 사례들이 늘어난다는 것의 치명적인 위험은 노동조합 운동의
    근본변혁성이 제거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정규직화를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금단의 영역으로 전환시키는 경로를 스스로 밟고 또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의 돌파가 아니라 현실의 안주, 현실의 변화가 아니라 현실에 적응하는
    그래서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세상에 노조를 맞추는 노조 변질과정이 보편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은 순식간이다. 지금부터 5년전만
    해도 비정규직은 정말 예외적인 상황인데 어느새 정규직이 천연기념물이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여기게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 한테조차
    ‘현실 가능성’ 운운하며 항복하고 적응하는 압력을 음으로 양으로 가하고 있다.


    저항을 포기한 것이다. 저들이 친 금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의 투쟁은 앙탈에
    불과하며 그 결과는 항상 더 많은 현실에 흡수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앙탈과
    흡수가 어느덧 인이 박혀 심리적 노예가 된다. 마치 매맞는 아내들이 남성 폭력에
    도망조차 치지 못하는 상황에 빠진다. 매맞는 아내 증후군이다.

    서양인 중에 마틴 셀리그만이라는 심리학자는 매맞는 아내 증후군을 “학습화된
    무력감” 이론으로 해명한다. 왜 매 맞는 많은 여성들이 그들의 학대자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매 맞는 아내 증후군에 빠지는 지를 설명하는 방편으로 실험 쥐를
    두고 실험을 했다고 한다. 실험쥐들에게 도망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
    전기충격을 반복적으로 가하였다. 그랬더니, 나중에는 쥐들에게 도망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전기충격을 주어도 도망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를 들어 스스로를 그 학대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어떠한 독립적 행동도
    취할 수 없는 자학 폭력 중독증에 빠지는데 이 증후군에 빠지면 탄압과 학대와
    설움이 당연한 현상이고 도움을 요청하거나 저항을 하는 것은 선택하지 못한다.
    심지어 최소한의 자존심도 버리고 학대의 원인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도와주려는 사람들에게 공격적 혹은 학대적인 태도를
    보이기까지 한다. 상황에 절망하여 그 상황을 극복하려는 마음 자체를 포기한
    끔찍한 무력감과 패배주의 현상이다.

    IMF 사태이후 최근의 한미 FTA까지 우리 사회는 개인이 이런 병증에 빠진 것이
    아니라 사회 자체가 이런 증후군의 도가니에 빠져 버렸다. 더 큰 문제는 이
    사회의 마지막 저항자가 되어야 할 민주노조운동 조차 이 증후군에 빠지고 만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많은 투쟁이 돈으로 정리하는
    경향들 관료적 과정으로 투쟁을 중재하는 모습들, 그래서 투쟁을 돌파가 아니라
    적응으로 만드는 경우들이 모두 어쩔 수 없다는 무력감과 패배주의가 발동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어느덧 우리 노조운동의 근저에 패배적 허무주의적
    병증이 불치병이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이 심장이 타버리는 걱정을 주는
    것이다.

    정규직화, 현장으로 완전한 복귀라는 아주 작은 개량조차 불가능이라고 장막을
    치는 자본의 의도에 말리지 말자. 단 한 번의 승리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 보자.
    때론 일점돌파 투쟁! 그것이 어느 순간 권력과 자본의 가장 약한 고리에 대한 가장
    강력한 공격일 수 있다. 희망이 없다 라는 말이 절로 터져 나오는 장투 노동자들의
    한숨이 너무 아프다. 우리는 진정 희망을 꿈꿀 자격조차 포기할 것인가.

    2005년 5월 3일 [출처:금속노조홈]호연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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